30년만에 극장 개봉 '파업전야'...그리고 장동홍 감독
1990년 봄, 전국을 떠들썩 하게 만든 '파업전야'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첫 노동영화, 독립영화의 전설. 따라 붙는 수식어가 많지요. 당시에는 극장에 영화를 걸려면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심의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의 현실을 정면에서 고발했던 까닭입니다. 정부는 '파업전야'를 불법 영화로 규정하고 탄압합니다. 이 작품을 상영하려는 극장주를 고발하고, 영사기와 필름을 압수하기도 합니다. 또 경찰력을 동원해 상영장소를 원천 봉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파업전야는 전국 대학가를 돌며 학생회관, 체육관 등에서 상영을 강행했고, 비공식적으로 관객 30만명 이상을 기록합니다.
1000만 영화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30만이 뭐 그리 대수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흥행 대박 수준입니다. 그즈음 연도별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살펴보면 서울 기준으로 1986년 어우동 47만 9000명, 1987년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26만명, 1988년 매춘 43만 2000명, 1989년 서울무지개 26만 1000명, 1990년 장군의 아들 67만 8000명 이라고 합니다. 특히 1990년에는 장군의 아들에 이어 남부군 32만명,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31만명,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8만 명이 뒤를 이었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까지도 대학 신입생이 되면 노이즈가 심한 비디오 테이프로 '파업전야'를 보는 게 통과 의례 이기도 했는데요. 요즘 이었다면 VOD로도 대박이 났을 것 같습니다.
'파업전야'는 영화 운동을 하는 젊은 청춘들이 뭉친 장산곶매라는 단체에서 만들었습니다. 감독 크레딧에 무려 4명이나 이름을 올렸습니다. 장동홍 이재구 이은기 장윤현 감독입니다. 당시 유행한 문화 창작 방법론(집단 창작)에 따른 결과라고 하는데요(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류의 러시아식 연출 기법을 가미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굉장히 할리우드 적인 연출 기법으로 영화가 연출되어 있습니다. 1992년 인기 드라마 '질투'에서 360도 회전 엔딩신이 유명한데, '파업전야'는 이미 2년 앞서 클라이막스 장면에 360도 회전 기법을 사용합니다.
오는 5월 1일 노동절에 4K 작업으로 영상과 음향을 업그레이드 한 '파업전야'가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다고 합니다. 많은 수의 스크린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오랜 세월을 건너 뛰어 스크린을 통해 이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참 묘하네요. (저는 비디오 세대입니다.) '파업전야'의 감독 네 분 중 연출 지분(?)이 가장 많다고 하는 장동홍 감독님을 9년 전에 만나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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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징글징글한 사람이 있다. 굉장히 재수 없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이익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손해 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도 젊은 시절에는 꿈과 이상을 갖고 사회 변혁을 위해 스크럼을 짜지 않았을까? 도대체 왜 변하게 됐을까. 이런 사람을 한꺼풀 벗겨보고, 걸쭉한 이야기와 행동을 보태면 재미있지 않을까. 영화 ‘이웃집 남자’는 그렇게 출발했다.
제작비를 투자받는 게 쉽지 않았다. 영화가 엎어지는 데는 수만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은가. 위기도 있었다. 2007년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 제작지원 작품으로 뽑히며 간신히 숨통이 트였다. 지난해 여름 촬영에 돌입했다. 한 달 동안 17회차로 촬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18일 마침내 개봉했다. 장동홍(47) 감독이 오랜 친구이자 ‘고래’를 쓴 소설가인 천명관 작가와 술잔을 나누며 의기투합한 지 5년만이다.
‘이웃집 남자’는 오로지 돈만이 지배하는 요즘 세상에 ‘제대로’ 적응해 살아가는 중년의 부동산 중개업자 상수(윤제문)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먼저 빼앗지 않으면 누군가 빼앗아 가는 게 자본주의 법칙이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상수는 그러나, 마냥 밉지만은 않다. 연민도 느껴진다. 장 감독은 “‘이웃집 남자’는 주연 배우에 초점을 맞춘 캐릭터 영화라 복합적인 인물인 상수는 연기자라면 탐을 낼 만한 역할”이라면서 “윤제문이 제격이라 판단됐고, 그의 매력이 첨가되며 원래 시나리오와는 달리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지는 캐릭터로 재탄생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30대 중반 이상의 남자 관객이 공감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시사회 때 20대 여성 관객이 “너무 잘 봤다”며 악수를 청해 내심 깜짝 놀랐다는 장 감독은 ‘이웃집 남자’가 자신에게 정말 행운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오로지 영진위 지원금으로 만들어 제작비가 부족했으나 내용적으로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는 것.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다. 제작비 제약으로 A4지 60쪽에 달하는 시나리오를 40쪽 정도로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상수가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 전에 손에 피를 세게 묻히는 장면이 필요했어요. 영화에서는 생략됐지만 용역 깡패를 동원해 리조트 개발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쓸어버리는 장면을 찍으려고 했지요. 깡패들이 시위대를 덮치는 순간 상수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소리만 들려주는 식으로요. 일그러지는 상수의 얼굴에서 스펙터클을 찾고 싶었는데 안타깝죠.”
장 감독이 ‘이웃집 남자’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변한 것은 시대 상황이 아니라 너 자신”이라고 술에 취해 상수에게 한소리하는 경호(박혁권)의 말에서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장 감독은 ‘영화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말라.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라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을 꺼내 놓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두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네요. 누구라도 선한 가치를 추구하고 악한 것을 배격하며 약자 편에 서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 같아요. 세월이 지나 그런 것이 없어졌다면 타락했다고 볼 수 있죠. 그것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 감독 자신은 변하지 않았을까. “레이몬드 카버를 좋아해요. 블루칼라 출신으로 뒤늦게 작가가 됐죠. 그 양반이 굽히지 않으면 부러진다. 동시에, 실컷 굽히고서도 부러질 수 있다고 했어요. 적어도 제 생각과 반하는 작품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장 감독은 이번 작품을 스크린에 걸기까지 정말 먼 길을 돌아왔다. 서울예전 영화과 재학 시절 사회 현실을 담은 단편 ‘노란 깃발’과 ‘그날이 오면’을 만들었고, 대학가 순회 상영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그가 한양대, 중앙대 영화 친구들과 함께 만든 그룹이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다. 그리고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를 세상에 선물했다. 장산곶매에서 함께한 사람들이 홍기선·장윤현·이은·공수창 감독 등으로 모두 제도권에서 성과를 냈다. 장 감독도 1998년 김현주와 박용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멜로 영화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으로 상업 영화에 도전했지만, 크게 깨졌다. 충무로 영화를 처음 하면서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게 패착이었다고 했다.
“여러 요소에 멜로가 섞이면 몰라도 멜로 중심의 이야기는 제게 맞지 않았는데 그때는 그것을 모르고 덤벼들었죠. 그 뒤로 멜로는 항상 겁나요. 하하하. 빨리 작품을 다시 만들어 성과를 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어요. 시나리오 한 편을 쓰면 1년이 훌쩍 지나갔죠. 스포츠 휴먼드라마 ‘아이언맨’이라는 작품은 중간에 중단되기도 했죠. 먹고살기 위해 아르바이트 삼아 방송 쪽 일을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새 작품을 내놓기까지 12년이나 걸렸네요.”
다음 작품을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건네자, 장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 “이번 작품에는 제 주장이 많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다음번엔 ‘이웃집 남자’보다 조금 덜 날이 선, 좀 더 대중적인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처럼 감동과 함께 인생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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