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우연치 않게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됐을 때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태식 선수 입니다.
원활한 글읽기를 위해 플레이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70년말부터 80년대 초반을 뜨겁게 만들었던 복싱 영웅이었죠. 화끈한 인파이터..
그러나 그 생명이 길지 못했습니다. 5년 동안 17승(13KO)3패의 전적을 남기고 링을 떠났습니
다.경기를 치르며 뇌에 손상을 입었고,그 때문에 뇌 수술까지 받게 됩니다.하지만
저의 아버지가 그때 당시에 복싱을 무척 좋아하셨기 때문에 -머 그 시절에는 누구나 다그랬겠지만-
아마도 김태식 선수가 이바라를 눕히고 세계챔피언이 됐을 때를 중계로 지켜봤을 겁니다.
77년 프로복싱 신인왕전 최우수선수였던 김태식 선수는
1980년 2월 WBA 플라이급 챔피언 루이스 이바라(파나마)와 승부를 겨룹니다.
2회 1분11초만에 이바라를 KO 시키고 만인지상에 올랐던 김태식 선수는
당시 경기 시간인 4분11초 동안 무려 221개의 펀치를 날렸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도 기억이 사실 희미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김태식 선수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어렸을 때 읽었던 김태식 선수의 자서전 때문입니다. 또김태식 선수가 제 집안 고향인 북평
(지금은 동해)에서 가까운 묵호 출신이라는 지역감정도 있었죠..
어쨌든..국민학교에 다니던 저에게 김태식 선수의 자서전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챔피언이 되는 과정,그리고 머리 손상으로 어쩔 수 없이 링을 떠났던 과정까지
구구절절 감동을 먹었었죠.단번에 어렸을 때 우상이 됐었죠.
그 자서전 제목이 '빛을 내리소서'였습니다.
그런데 김태식 선수는 그 자서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2004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서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운 좋게 복서로 풀려서 그렇지 아니면 나도 교도소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재소자들에게 나의 얘기를 해주고 돕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런데 우연히 만나 친해진 대기업 기획실장이 내 얘기를 책으로 쓰겠다는거예요. 그래서 판매는 않고 재소자들에게만 나눠 주는 조건으로 비용을모두 댔어요. 그런데 엉뚱하게 ‘하느님의 응답을 받아 소생했다’는 식으로 내용이 변질되고, 나도 모르게 책방에 나가 팔리고 있는 거예요.” 왕년의 돌주먹 김태식(50)씨.20전 17승(13KO승) 3패가 말해주듯 일발필도의 펀치로 1980년대 초반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의 복싱 경력은 짧지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다. 홍수환 전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챔피언을 키운 명트레이너 김준호씨에 의해 1977년 입문했다. 데뷔 2년여만인 80년 2월 WBA 플라이급 챔피언 파나마의 루이스 이바라를 2회 1분11초만에 KO로 눕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82년 9월 현역은퇴 후에는 사기극에 휘말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6년 전 서울 면목동 동부시장 한편에 음식점 ‘불타는 돼지껍데기’를 운영하면서 뒤늦게마나 평범한 가장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그곳에서 김씨를 만났다. 부인 양미선(36)씨와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맞았다.
“시장손님들 상대로 장사를 하는데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다.”며 최근의 주변 경제상황을 전했다. 아울러 “돼지껍데기 장사는 올해로 6년째다. 돼지껍데기를 숙성시키는 여덟가지 비법을 터득할 정도로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생겨났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어 선수생활을 그만둔 뒤 무역회사와 갈비집 등을 운영했으나 사회적응을 잘 하지 못해 실패와 방황을 거듭했다고 털어놨다.80년 한해에만 하더라도 4억여원을 벌어들일 정도였지만 지금은 돈과 사람을 모두 잃었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난 김씨는 어릴 적부터 천부적인 싸움꾼으로 통했다. 김씨 역시 “동네 아줌마들이 복싱선수로 키우라고 할 만큼 싸움이 팔자였다.”고 회고했다. 중학 때인 68년 서울 가리봉동으로 이사 온 그는 영등포 일대를 전전하다가 22살 나이에 복싱을 하게 된다. 데뷔전부터 혈투였다.1,2라운드를 실컷 두들겨 맞더라도 3,4라운드에서 왼손 훅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경우가 많았다.“복싱은 대개 잽과 원투스트레이트로 하지만 어릴적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다쳐 훅 한방에 의존했다.”고 토로했다.13KO승을 거둔 것도 대부분 왼손이었다. 지금도 시비 거는 건달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을 때가 더러 있다고 귀띔했다.
“복싱 얘기는 밤새도록 해도 모자랍니다. 시합 때 초반 탐색전을 치르고 4라운드부터 승부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많이 맞아도 충격을 가진 한방을 날리면 된다고 생각했죠.”
결혼 후 아이 우유값이 없어 선후배들에게 손을 벌린 적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자식을 키우다 보니 돈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 살림집은 현재 경기도 역곡이지만 새벽까지 일을 하는 처지여서 인근에 임시 거처를 마련, 부인과 둘이 지내고 있다. 역곡집에는 80세된 노모, 중학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가 살고 있단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하루 14시간 연탄가스를 맡으며 장사를 해도 피곤한 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직이 통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강성남기자 snk@seoul.co.kr
[저작권자 (c) 서울신문사] 인물포커스] 김태식 '4각의 링, 그 애증의 기억' 얼마전 몇몇 매스컴에 난 최근 사진을 눈여겨봐두지 않았더라면 못 알아볼 뻔했다. 깊게 파여 더 작아보이는 눈. 희끗희끗 센 머리카락. 덥수룩한 수염. ◇4각의 링. 그 애증의 기억 WBC 플라이급 챔피언이었던 박찬희와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이었던 구시켄 요코다. 특히 박찬희와의 라이벌전은 큰 기대를 모았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찬희는 엘리트에 테크니션이고. 저는 권투를 한 덕에 건달을 면한 그런 이미지였잖아요. 링 위에서 ‘흑백’을 가려보고 싶었어요. 파이트머니를 안받아도 좋다고까지 했어요. 면목동에서 장사할 때 찬희 녀석이 와서는 한번 붙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돈만 많이 달라고 농담했죠. 마음이야 지금도 하고 싶지만 진짜 맞붙으면 제가 죽죠. 그러면 ‘살인펀치 박찬희’라고 신문에 나겠죠?” 구시켄 요코와의 대결에 대해서는 다른 면에서 아쉬움이 크다.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시켄이 한국선수들 도전을 다 받아주면서 나만 안받아줬어요. 정말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한 체급을 올렸던 건데 그 한체급이라는 게 정말 무서운 거였어요.” 사진 | 성복현전문기자 hsung@
본인에 대한 자서전이 의도와는 다르게 꾸며졌다는 것에 실망과 분노
를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저와 같은 어린 친구들에게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줬다는 점을 김태식 선수가 위안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는 김태식 선수를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을 결국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맡은 분야가 틀리고 머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즘 김태식 선수의 소식이 다시 들려옵니다.은퇴 이후 삶의 질곡이 엄습해오며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김태식 선수는 다시 링에 돌아왔습니다.
이젠 선수가 아니라 관장입니다.
요즘 복싱이 참 재미가 없습니다.지난번 열렸던 오스카 델라 호야와 플로이드 메이웨
더 주니어의 세기의 대결은 아웃복싱을 구사하는 메이웨더 때문에 정말 싱거운 경기
밋밋한 경기가 됐습니다.
김태식 선수,아니 관장이 자신처럼 화끈했던 인파이터를 길러내 복싱 인기를 되살리는
데 한 몫했으면 싶습니다.
김태식 선수와 이바라의 대결 동영상을 구해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네요.
조만간 구해서 올려놓겠습니다.
대신 2005년 회사 선배가 김태식 선수를 인터뷰했던 기사와 오늘 스포츠 서울 최정식
선배가 쓴 기사를 첨부합니다.김태식 선수를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입니다.
김태식 선수는 바로 아래와 같은 사람이랍니다. 두 개의 인터뷰를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네요.
-----------------------------------------------------------------------------------
-------------------------------------------------------------------------------
[어떻게 지내세요] 前 WBA밴텀급 챔프 ‘돌주먹’ 김태식
[서울신문 2005-05-17 08:45]
[서울신문]“요즘 서민경제가 안 좋은 것 같아요. 장사도 잘 안 됩니다.”
김태식씨
1980년 2월 프로복싱 WBA(세계복싱협회) 플라이급 타이틀매치에서 폭풍같은 연타를 몰아치며 챔피언 루이스 이바라(파나마)를 KO로 눕혀 온 국민을 열광케했던 ‘돌주먹’ 김태식(51)은 그렇게 다소 낯선 모습이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경기도 부천시 원종동에 ‘김태식 복싱짐(Gym)’을 개관하며 링으로 돌아온 그는 아직 어수선한 체육관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인터뷰하려면 수염 손질도 좀 해야하는데 보시다시피 체육관 차리느라고 바빠서….” 수염은 부인의 권유로 길렀다고 한다. “덩치도 작고 위엄이 없어보인다고 채근하더라고요.”
후배들이 하다가 운영이 안돼 내놓은 체육관을 맡았다. 이제는 ‘김 관장’이라는 호칭을 갖게 된 그를 보자 세 명의 김 관장이 관원 모집으로 속을 썩이는 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관원 모집이 순조로운지 묻자 옆에 있던 ‘후원회장’ 이창윤씨(중소기업 사장)가 대신 나섰다. “어제(5월14일) 문을 열었는데 첫날 20명 정도 찾아왔어요. 대부분 아버지들이 중학생 아들 손을 이끌고 왔어요. 모두 학생때 형님 권투에 반했던 분들이죠.” 40대 이상이나. 그것도 이름을 밝혀야 그를 알아본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체육관이고 미쳤던 권투였는데 다시 들어와보니 다 식은 줄 알았던 열정이 살아나더군요. 천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터뷰가 아니라 한창때 그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위빙과 더킹을 하듯 줄곧 머리와 상체를 흔들었고. 살인적인 양훅을 휘두를 때처럼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여 큰 제스처를 취했다.
속사포 주먹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한때 그토록 환멸을 느꼈던 복싱계에 돌아온 이유를 물었던 까닭이다. “명예와 부를 위해 젊음을 투자했어요. 그런데 그 투자의 결실이 제대로 선수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선수가 있어야 권투가 있는 건데 선수가 혜택을 입어야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파이트머니를 50-50으로 한다던데 그렇게 하면 안돼요. 선수가 봉입니까? (김)득구처럼 죽으면 누구 책임지는 사람이 있나요? 프로권투가 시작된지 50년이 넘었는데 (한국권투위원회는) 모아놓은 돈이 한푼도 없어 사글세를 살고 있어요. 경기마다 꼬박꼬박 뗀 돈은 다 어딜 갔는지. 그런 것들 때문에 한참을 이쪽으로 안왔어요. 권투를 사랑하기 때문에 권투를 없애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면목동에서 장사할 때(2000년 동부시장에 음식점을 열었다가 이번에 체육관을 개관하면서 손해를 보고 정리했다) 관장이나 매니저들이 찾아왔는데 그때도 그런 생각이 바뀌지 않았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또 열받네. 그래서 제가 적이 많아요.” 그랬던 그는 우연히 후배들이 운영하던 체육관을 맡게되면서 마음을 바꿨다. 프로복싱이 사양 종목이 된 것은 스타플레이어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안목은 있으니까 좋은 선수를 발굴해 키워보고 싶었어요.”
◇권투와 복싱 사이
지난해 세계챔피언 출신인 최용수가 K1에 진출했다. 프로복싱을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이종격투기에 대해 물어봤다. “이종격투기 그거 오래 못갑니다. 보십시오. 벌써 한계가 드러나고 있어요. 그 뭐죠? 망을 치고 그 안에 들어가서 하는 거?(킹 오브 더 케이지를 말한 듯) 그건 좀 싸움같던데. 일본에서 하는 건 제대로 된 격투기가 아닙니다. 요즘 권투가 너무 재미 없으니까 그 틈을 파고든 거죠. 멋있게 주먹질하고 관중을 흥분시킬 수 있는 선수가 없으니까. 너클로 때리지 못하고 소리만 요란하게 뺨치듯 하는 선수들 보면 욕이 나와요. 돈 주고 들어온 관중 앞에서 그런 식으로 밥빌어 먹으려고하면 되겠어요. 제 권투철학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무식한 거였어요. 선수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관중에게는 그 이상 매력적인 경기가 없죠. 제 경기가 어떻게 끝날지 몰라 잠시도 한눈 팔 수 없었어요.”
그는 복싱보다 권투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영어와 한자라는 차이를 떠나 복싱은 왠지 아마추어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사실 체육관이라는 간판이 더 마음에 들지만 요즘 흐름을 무시할 수도 없어 복싱짐이라고 이름붙였어요.” 현실과의 타협은 간판 뿐만은 아니다. 좋은 선수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고 생활체육이라는 이름의 장삿속을 경멸하지만 일단은 생존해야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저희때처럼 운동시키면 힘들어서 하루도 못견디고 그만둘 걸요. 일단 살아남으려면 현실을 인정해야죠. 좋은 재목들은 분리해서 관리할 겁니다.”
◇챔프 김태식 vs 인간 김태식그의 경력은 짧고 굵다. 강원도 묵호 태생인 그는 1977년에 데뷔해 5년뒤 은퇴하기까지 17승(13KO)3패의 전적을 남겼다. 이바라에게 챔피언벨트를 빼앗았던 때를 그는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80년 2월17일이 설날 다음날이었는데 다음날 새벽 4시부터 언론에 시달렸어요. 몇시간 전만 해도 외롭고 초라했고 강한 상대를 맞아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이 한순간 유명해졌죠.”
그러나 영광의 시간은 짧았다. 그해 12월 미국에서 치른 2차 방어전에서 패했다. 2년 뒤 라미레스(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쓰러진 뒤 뇌수술을 받았고 그것이 선수로서의 마지막이었다. “몇년 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못했어요. 모두들 색안경을 끼고 봤거든요. 화를 내면 수술받고 이상해져서 그런다. 웃으면 수술이 잘못됐는가 보다 그런 식이었어요. 심지어는 죽었거나 식물인간이 된 걸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뇌수술은 10년이 지날 때가 고비라는데 의사 선생님이 겁을 많이 줬어요. 제가 다시 권투할까봐 걱정하셨나봐요. 그만큼 권투가 마약같은 데가 있어요.”
그는 은퇴 후 여러가지 사업을 했지만 사기를 당하는 등 실패를 거듭했다. “사회생활이 참 어렵더라고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거든요. 사업하려면 그래서 안되는데 말이죠. 많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완벽하게 적응하지는 못했어요.”
30대 후반에야 가정을 이뤄 부인 양미선(36)씨와의 사이에 중학생 남매를 두고 있다. “제 자신을 잘 알다보니 결혼이 늦어졌어요. 좋은 조건으로 결혼할 사람이 몇 있었는데 ‘너희들이 바보같이 생긴 김태식을 좋아하겠느냐. 이름에 끌린 것이겠지. 내 초라한 모습과 나쁜 점을 보게되면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있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어 독신으로 살려고 했어요. 사실 젊고 돈도 여유가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장사하면서 돈을 다 까먹고 원점으로 돌아오게되자 정신차리고 장가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운좋게 애엄마를 만났죠. 일방적으로 대시했어요. 그 때는 시간이 많이 흘러 이름도 잊혀졌고 애엄마와는 나이차도 있어서 내가 권투선수였는지도 몰랐어요. 못난 인간을 보고 결혼해줘 항상 고맙다고 말해요. 마음 속으로. 왜 속으로만 감사하냐고요? 제 성격이 원래 그래요.”
"박찬희와 꼭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
김태식에게는 꼭 맞붙어보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상대가 둘 있다.
최정식전문기자 buk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