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에게 노동운동이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죠.”
최규석 작가는 제가 좋아하는 만화가 중 한 분입니다. 수 년 전 인터뷰할 소중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인터뷰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나오는 작은 잡지(지금은 발행이 중단된)에 실렸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의 웹툰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최 작가의 첫 웹툰 작품인 '송곳'이 인기를 끌고 있었죠. 국내 매체에서는 공개되지 않았던 인터뷰를, 그냥 묻기에는 아쉬워 이 공간에 담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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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부터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1년 남짓 인기리에 연재되던 웹툰 ‘송곳’이 최근 세 권짜리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 외국계 대형마트의 부당해고에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인간 대접을 받기 위해 노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윤태호 작가의 ‘미생’에 이어 최규석 작가의 ‘송곳’까지, 비정규직을 조명한 만화가 잇따라 사랑받은 것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젊은 직장인과 취업 준비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미생’의 블루칼라 버전이라고 불리는 ‘송곳’ 역시 영화, 드라마 제작이 추진된다고 한다. 잠시 연재를 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최 작가를 만나봤다.
≫≫어렸을 때 만화 독자로서 최규석은?
-만화를 제대로 읽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다. 처음엔 ‘시티헌터’ ‘북두신권’ ‘드래곤볼’ 등 또래가 좋아하는 작품을 많이 봤다. 그러다가 ‘아키라’, ‘2001 스페이스 판타지아’, 아다치 미츠루, 김수정 선생님 작품을 접하며 취향이라는 게 생겼다. 고등학교 때는 에가와 타츠야, 오세영, 박흥용 선생님 작품을 열심히 찾아봤다. 만화가인 동네 형 화실에 자주 놀러가기도 했다. 창작자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하는 독자였다고 할까.
≫≫만화가 꿈은 언제부터?
-중2때 첫 단편을 그려 공모전에 냈다. 그 시절엔 중·고교생이 데뷔하는 일도 있었는데, 난 물론 떨어졌다. 고교 때 만화반 활동을 했고, 동네 형 화실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 너머로 배우기도 했다. 4년제 대학 만화학과에 진학한 것은 딱히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는 아니다. 교수 등 여러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대학 시절 용돈도 필요했고, 동기들과 경쟁심이 생기다보니 공모전에 도전했다가 덜컥 상을 받게 됐다. 그렇게 늘에 이르렀다.
≫≫리얼리즘 쪽으로 독보적 위치를 일궜다는 평가를 받는데.
-원래 사실적인 것을 좋아한다. 한 때는 모든 부분에서 현실적인 느낌을 주려고 매달린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에가와 타츠야, 박흥용 선생님 작품을 접하며 그런 생각이 깨졌다. 전달하려는 게 중요하지 현실적인 표현에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사건과 공간이 아니라 캐릭터의 현실성을 중요시하게 되니 작품에 파격도 생겼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등은 그런 과정을 거쳐 나왔다.
≫≫꾸준히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윤리 문제와 사회 구조에 관심이 많다. 사람을 그리려다 보니 사람을 둘러싼 틀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특히 현대 사회 내에서 윤리적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니 사회적인 작품처럼 비치는 것 같다. 윤리적 문제에 천착한 ‘기생수’ 같은 작품과 주제의식 면에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만화는 재미를 줘야 하나, 메시지를 줘야 하나.
-구분할 수 없다. 메시지가 좋으면 재미가 있다. 잘 표현해도 재미가 있다. 밝은 것, 웃음을 주는 것만 재미가 아니다. 독자들의 감정을 긁으면 재미를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지적 자극도 재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느끼지 못했던 재미 영역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종류의 재미는 현실의 미세한 부분을 얼마나 잘 뚫고 들어가느냐에 있다고 본다. 로맨스든 개그든 마찬가지다. 메시지가 담긴 작품도 똑같다.
≫≫‘송곳’은 젊은 세대에게 낯선 소재인데.
-‘100℃’를 하고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게 된 독자들에게 그래도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문제와 직결된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에 ‘송곳’을 생각하게 됐다. 찝찝함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웹툰 도전은 의외였는데.
-종이든 인터넷이든 어디든 연재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기왕이면 젊은 세대가 많이 접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찔러봤는데 성사됐다. 작품이 네이버보다 다음 웹툰에 어울린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은 곳에서 연재하면 더 신선하게 느껴질 거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네이버에서도 이러한 성향의 작품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았을까 한다.
≫≫첫 웹툰 작업인데 생소하지 않았는지.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 다만 그림 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종이에서는 손 끝의 미세한 감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컴퓨터로 컨트롤하려면 크게 확대해서 작업해야 한다. 절대적인 노동량이 늘어났다.(웃음)
≫≫‘송곳’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는데.
-노동운동이라는 소재를 한국 대중 서사 예술에 집어 넣는 게 목표였는데 어느 정도 바람을 이룬 것 같다. 영화, 드라마 제작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제 이런 소재를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아르바이트생 등 소소한 삶의 현장에서도 노동 문제가 이슈화되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잘 맞았던 것 같다.
≫≫‘미생’, ‘송곳’이 잇따라 사랑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들이 직업, 직장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콘텐츠가 나오기를 원했던 것 같다. ‘미생’과 ‘송곳’이 공감을 얻은 것은 거창하지 않게 독자들이 발 딛고 서있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의미 부여를 해줬기 때문이라고 본다. 실제 독자들이 느끼는 일, 직업에 대한 온도를 그대로 포착했다는 얘기다. ‘송곳’은 일의 조건과 윤리적 선택 지점을 일깨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미생’은 직장 일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 있어 외연을 확장할 부분이 더 많았다.
≫≫한국 만화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양이 많아지고 시장이 커지면 경쟁력 있는 작품이 생기고 해외 진출 사례도 많아질 것이다. 한국 만화 문화가 점점 확대되고 활성화되면 그런 것은 결과적으로 따라올 것으로 본다.
≫≫다음 작품은.
-‘송곳’ 캐릭터인 ‘구보신’이나 ‘이수인’을 따로 주인공으로 내세워 몇 작품을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전쟁 당시 이야기를 욕심내는 게 하나 있기도 하다. 마광수 교수 사건과 그 이후 삶에 대해 다뤄보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아직 무엇을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다.
글·사진 icarus@seoul.co.kr